죽음의 신화와 삶의 역사 사이에서 방황하는 폼페이


역사와 신화 중간쯤에 속하는 도시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인 서기 79년 8월 24일 한순간에 지구 상에서 자취를 감춘 폼페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하루아침에 사라지면서 신화의 일부가 되었던 폼페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592년 한 농부가 우연히 우물을 파다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신화가 역사가 되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역사에서 사라지기 전 폼페이는 로마의 축소판이었다. 베수비오 화산은 폼페이를 삼켜서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지만,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로마의 문명을 원형 그대로 간직한 유일한 유적지로 남을 수 있었다. 신화 속에서 죽음의 도시였다가 이제는 역사 속에서 삶의 흔적을 증언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Pompeii, 2014)은 이처럼 폼페이에서 살다 죽어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는 재난영화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이 비교적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나름대로 볼만한 영화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상태라면 그런대로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라고 하겠다. 천재지변 속에서 싹 틔운 사랑도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치명적인 몇 가지 결함으로 인해 몰입을 방해하는 점은 다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이야기의 근간이 그리 신선하지 못하다. 노예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부모님에 대한 원수와 복수, 그리고 검투사의 애환 등은 멀게는 '벤허'(Ben-Hur, 1959)에서 다룬 내용이고 가깝게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2000)에서 이미 본 내용이다.

그래도 스토리의 얼개가 촘촘하다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를 못하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반란군을 진압하는 로마군의 모습은 충분히 스펙터클했으나 그 이후는 지나치게 우연을 남발하고 있었다. 노예로 팔려간 주인공 마일로는 느닷없이 잉글랜드의 검투사로 나타나더니 갑자기 폼페이로 팔려가는데 동기나 이유에 해당하는 중간 부분은 모두 생략되고 없다. 그저 영화가 폼페이를 배경으로 하니 폼페이로 갈 뿐이다.

그중에서도 이 영화의 최대 약점이라고 한다면 로마의 상원의원 코르부스로 등장하는 키퍼 서덜랜드라고 하겠다. 그가 누군가. 미국 본토를 핵 위험과 각종 테러에서 구해내고자 하루 24시를 꼬박 바쳐 개고생하는 잭 바우어가 아니던가. 그가 선인이건 악인이건 상관없이 그의 입에서는 '댐잇 클로이'라는 대사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극장에서 미드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100만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 뚜렷한 경쟁작이 없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액션 장면이 나름대로 볼만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억지가 억지를 낳기도 하지만 눈 감아줄 만 하고 남자 주인공 마일로 역을 맡은 키트 해링턴의 깔끔한 용모도 인상적이다. 또한, 화산 폭발과 지진, 해일 등의 장면들도 군더더기 없어 보인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 폼페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싶다면 교육방송 EBS 다큐프라임을 먼저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수준 높은 로마 문명과 폼페이의 생활상, 그리고 유물 탐사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게 정리했으므로 먼저 보고 나면 영화를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2월 25일에 방영 다큐프라임 133회 '제국의 도시 - 폼페이' 편)

폼페이(Pompeii, 2014)
액션, 모험, 드라마, 멜로/애정/로맨스 | 미국, 독일 | 104분 | 2014.02.20 개봉 | 감독 : 폴 W.S. 앤더슨
출연 : 키트 해링턴(마일로), 에밀리 브라우닝(카시아), 키퍼 서덜랜드(코르부스), 캐리 앤 모스(아우렐리아)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화이트)

115
126
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