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궐 안에서 왕과 왕비를 가까이 모시는 내명부를 통틀어 이르던 말'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궁녀'는 그 원래 의미와 관계없이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다. 많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왕의 잠자리를 시중드는 여자'라는 뜻으로 사용된 탓이다. '궁녀=후궁'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겠다. 백제 의자왕의 문란함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삼천궁녀도 그런 식이다.
연극 '수상한 궁녀'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심스럽다는 뜻의 '수상(殊常)'과 '궁녀'라는 단어가 만나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내용일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만드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왕궁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음모를 다루는 서스펜스 장르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궁궐 안의 은밀하고 에로틱한 사생활을 떠올리게 만드는 까닭에서다.
사실 자극적인 제목(사실 '수상한 궁녀'라는 제목이 자극적인지는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은 양날의 칼이다. 관심받는 데는 유리할지 몰라도 상상력에서 비롯된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경우 작품의 질과 관계없이 평가절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시작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게다가 스토리도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그럼 이 작품은 도대체 어디에서 승부를 걸려고 하는 것일까.
첫 번째 수상한 키워드는 '처녀'다. 처녀들을 임금에게 조달하던 이인문과 내시가 열 명이 넘는 후궁을 들이고도 후사를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임금에게 처녀가 아닌 출산드라 흥부처를 궁녀로 천거한다는 데서 첫 번째 은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5명의 아이를 낳은 출산 경력을 속이고 29살에서 19살로 나이까지 속인 그녀가 수상해 보이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수상한 키워드는 '체위'다. 흥부처는 등에 종기가 있어서 똑바로 누울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임금의 씨를 받으려면 별 수 없이 임금의 위로 올라타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왕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불경스러운 일이었기에 중전뿐만 아니라 대신들 사이에서 한바탕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왕자의 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세라는 논리가 먹히면서 망측한 체위로 첫날밤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수상한 궁녀의 수상한 체위다.
세 번째 수상한 키워드는 '출산'이다. 여성 상위 체위의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 한 번의 관계로 수태하게 된 흥부처는 '박빈'이라는 정1품의 품계까지 누리게 되나 그녀가 낳은 왕자를 둘러싼 주변의 시선들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다. 그 아이는 과연 임금의 씨를 받아 낳은 아이일까 아니면 다른 외간 남자의 아이일까. 처녀가 아니니 그저 수상하기만 하다.
연극 '수상한 궁녀'의 하이라이트는 체위로 인해 비롯되는 논쟁들이다. 처음에는 무엄하다며 진노하던 임금도 여성 상위 체위를 한번 경험해 보더니 식은땀도 안 나고 누워서 정사를 생각할 수도 있기에 일석이조라며 만족해하기도 하고 수상한 궁녀가 수태를 하게 되자 미수에 그쳤지만 중전도 임금이 잠든 사이 몰래 여성 상위 체위를 시도해 보려고도 한다.
하지만 중반을 지나면서 스토리가 다큐로 흐른다는 점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스토리가 체위 문제로 한바탕 웃고 난 후에는 후궁의 수태로 인해 벌어지는 궁궐 안의 암투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상한 궁녀의 기구한 운명이라는 부분으로 초점이 맞춰져 버리는데 배우들은 열연을 펼치지만 보고 있는 관객 입장에서는 첫맛과 끝 맛이 다른 맥주를 먹는 듯 뭔가 찜찜해진다. 속물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어차피 체위 문제를 꺼낸 김에 차라리 코믹을 더 부각시켰으면 어떨까 싶었다.
지난 2011년 9월 서울가정법원은 남편이 혼전순결에 집착한 나머지 아내를 문란한 여성으로 의심한다면 이혼 사유가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혼인 파탄의 근본 원인 및 주된 책임은 혼전순결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 A씨에게 치욕적이고 모멸적인 말을 한 B씨에게 있다"라는 게 판결 사유였다.
재판부에 따르면 신혼여행 첫날밤을 맞은 신랑 B씨는 "나는 경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A씨에게 말했고 결국 신부 주도로 잠자리가 이뤄졌다. 이에 B씨는 아내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생각을 갖고 "업소 여자 같다"라는 말을 던졌으며 A씨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후 B씨 회사의 부부 동반 회식 자리에 참석한 A씨가 음담패설을 불쾌해하지 않고 응대하자 B씨는 "너는 회사 동료들 앞에서 나를 망신 줬고, 내 회사 동료 한 명이 네게 윙크를 했다"라며 크게 화를 냈다. 또 B씨는 A씨가 "친구들과 외박을 해도 되겠느냐"라고 물어보자 "어머니한테 물어보니 절대 안 된다더라"며 마마보이 태도까지 보였다는 것이다.
부부 관계가 악화되자 A씨는 B씨에게 화해의 손길을 건넸다. A씨는 결혼식 주례사를 e메일로 보내 "우리 결혼 생활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남편 B씨는 "여자가 조신한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했는데 네 행동은 내 가치관에 부담스럽다"는 답장을 보냈다. 결국 이들의 결혼 생활은 2010년 1월 혼인한 지 보름 만에 파경을 맞았다는 게 이 부부 사이에 벌어진 일의 전모였다. 생뚱맞을지는 몰라도 무엄하게 임금의 배를 올라타겠다던 '수상한 궁녀'를 보며 문득 떠올랐던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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