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과학수사가 정말 이 정도였단 말인가, 범죄의 추억 내가 사는 세상


아내의 불륜을 눈치챈 남편이 아내가 베고 자는 베갯잇을 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로 찾아왔다. 조그만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처의 부정한 행위로 인해 사업도 팽개치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식어 버려 가정마저 파탄 직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베갯잇에 정액이 묻어있다며 내밀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배개를 이용해서 부부 관계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그 정액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대한민국 과학수사의 진실과 오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범죄의 추억'이라는 책에서 소개하는 '과학수사 실화이야기'에 등장하는 첫 번째 사례로 아내의 불륜으로 고통받는 남자와 남편의 의심으로 상처받은 아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칫 파경으로 이어질 뻔했던 이들 부부는 국과수의 검사를 통해서 오해를 말끔히 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25년간 몸담았다가 정년을 맞은 최상규 생물학과장으로 그야말로 국과수의 산증인이자 대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인물이다. 그만큼 이 책은 국과수에서 진행했던 다양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첫 번째 사례였던 '이불 천 조각을 가져온 남자'(p50)부터 시작해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p292)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례들이 담겨 있다.

그중에는 명쾌하게 처리된 사건도 있는 반면, 영구미제로 남아있는 사건도 있다. 백골 시체의 두개골과 피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평소 실물 사진을 중첩시켜 여러 각도에서 일치점을 비교 검사하여 신원을 식별해 내는 슈퍼임포즈라는 방법으로 억울하게 숨진 초등학생의 계모를 검거했던 사건('사라진 소녀', p77)은 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정황상 범인임이 확실시되는 피의자를 잡고도 증거물에서 범죄의 흔적을 찾지 못해 끝내 무죄 판결을 받았던 사건인 'R노파 살해 사건'(p194)과 '여대생 살인 사건'(p204)은 후자에 속한다.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뿐더러 임의성이 있는 자백이라도 그 신빙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진술이 객관적인 합리성을 갖고 있어야 하고, 자백의 동기가 합리적이어야 하며, 자백 외에 정황 증거와 자백이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게 판결의 이유였다.



이처럼 이 책은 한국 과학수사가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의 과학수사가 발전하기까지의 힘들었던 과정을 올바로 알려 우리나라 미래의 과학수사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자 지나간 범죄 사건들을 일일이 추억하면서 자료를 정리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유전자(DNA)지문 감정기법이 도입된 것은 불과 22년 전(1991년)이고 1992년 5월, 의정부에서 발생한 어린이 강간 추행 사건 해결이 최초라고 한다.

이 책은 제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과학수사란'에서는 과학수사의 기원과 현대 과학수사의 발전 현황, 그리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업무의 중요성 등 과학수사의 기본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제2부 '국과수 발령을 받으면서'는 국과수와의 첫 만남과 몸으로 때우던 초기 과학수사 시절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제3부 '과학수사 실화이야기'에서는 실제 사례들을 들려주고 있다. 제4부 '칼럼, 수필, 기타 신변잡기'는 저자의 소회가 담겨있다.

특히 1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제3부 '과학수사 실화이야기'에서는 이웃의 말만 믿고 생모를 계모라 주장하던 황당한 사건('나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p54)부터 시작해서 90세 할머니를 강간한 고등학생의 기이한 사건('남학생 할머니를 강간하다' p154)들도 있고 과학수사로 밝히지 못한 과학수사의 한계('찻집의 살인 사건', p189)도 있다. 때로는 어이없기도 하고 때로는 오싹하기도 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면서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든다.

미국드라마 'CSI(Crime Scene Investigation)' 시리즈가 유행하면서 모든 사건들이 과학수사를 통해서 저절로 풀리리라 믿고 있는 시각들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사건을 해결하기까기 얼마나 많은 수사원들이 증거를 찾기 위해 현장에서 고생하고 그 수많은 증거들에서 단서를 찾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연구원들이 고생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은 사람 손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일선에서 수고하는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는 바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용이 다소 투박하다는 점이다. 전문 작가가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읽는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점에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다소 산만해진 것도 아쉽다. 차라리 극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주요 사건들만 다루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렇게 되면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닌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발전상을 소개하고자 하는 저자의 목적과는 반대방향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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